Before I quite knew what had happened, we had arranged to meet at the hospital that afternoon.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우리는 그날 오후 병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마친 상태였다.
정신 차려보니 이미 약속 완료! 에리너의 철벽 방어막이 레이먼드의 다정한 오지랖(?)에 뚫려버린 순간이야.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이 에리너에게는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얼떨떨한 일인가 봐.
I hung up and looked at the clock on the living room wall, above the fireplace
나는 전화를 끊고 벽난로 위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전화를 끊고 난 뒤의 그 정적... 에리너는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시계를 보며 현실 파악 중이야. 약속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보는 저 뒷모습, 왠지 낯설고도 설레지 않니?
(it’s one I got in the Red Cross shop: electric blue circular frame, Power Rangers;
(그것은 적십자 중고 매장에서 구한 것인데, 선명한 파란색 원형 테두리에 파워레인저가 그려진 시계였다.)
에리너의 인테리어 취향 공개! 무려 '파워레인저' 시계라니. 중고 매장에서 보물찾기하듯 골랐을 에리너를 생각하면 너무 웃음이 나지? 지적인 그녀와 아동용 캐릭터 시계의 이 엄청난 괴리감, 이게 바로 에리너만의 매력이야.
adds a kind of rakish joie de vivre to the living room, I’ve always thought).
그것이 거실에 일종의 파격적인 생동감을 더해준다고, 나는 항상 생각하곤 했다.)
파워레인저 시계를 보며 'Rakish joie de vivre(파격적인 삶의 기쁨)'를 느낀다니! 역시 고전 전공자다운 고급 어휘로 자기 취향을 정당화하고 있어. 에리너 눈엔 그 시계가 거실의 분위기를 확 살려주는 아주 엣지 있는 아이템인 거야.
I had several hours until the rendezvous. I decided to take my time getting ready,
만남의 시간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여유를 가지고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약속을 'Rendezvous(랑데부)'라고 표현하는 에리너 좀 봐. 그냥 병문안인데 무슨 비밀 접선이나 데이트라도 하는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 준비하는 데 시간을 들이기로 한 걸 보니 에리너도 내심 이 만남이 신경 쓰이나 봐.
and looked cautiously at myself in the mirror while the shower warmed up.
그리고 샤워기 물이 따뜻해지는 동안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거울을 'Cautiously(조심스럽게)' 본다는 말이 참 마음 아파. 자신의 외모, 특히 흉터가 있는 얼굴을 마주하는 게 에리너에겐 여전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보여주거든. 레이먼드와의 만남을 앞두고 타인에게 비칠 자신의 모습을 가늠해보는 에리너의 복잡한 심경이 느껴져.
Could I ever become a musician’s muse? I wondered. What was a muse, anyway?
내가 과연 어느 음악가의 뮤즈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궁금했다. 그런데 뮤즈란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에리너가 지금 김칫국을 마시다 못해 태평양급으로 들이켜고 있어! 자기가 그 가수의 '뮤즈'가 될 상상까지 하다니, 짝사랑의 힘은 정말 위대하지? 그런데 역시 논리적인 에리너답게 '뮤즈'의 정의부터 스스로에게 묻고 있어. 낭만과 분석이 동시에 돌아가는 묘한 뇌 구조야.
I was familiar with the classical allusion, of course, but, in modern-day, practical terms,
물론 고전적인 비유에는 익숙했지만, 현대의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에리너가 고전 전공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대목이야. 그리스 신화 속 뮤즈는 잘 알지만, 지금 당장 레이먼드랑 병원 가야 하는 21세기에 그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실용적(practical)'으로 분석하겠다는 거지. 에리너의 뇌는 지금 현실 필터 가동 중!
a muse seemed simply to be an attractive woman whom the artist wanted to sleep with.
뮤즈란 단순히 예술가가 함께 잠자리에 들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여성인 듯했다.
와, 에리너의 뼈 때리는 팩트 폭행 좀 봐! '예술적 영감'이라는 고상한 포장지를 확 벗겨버리고 '결국 같이 자고 싶은 여자 아냐?'라고 결론 내리고 있어. 사랑에 빠졌으면서도 이런 냉소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에리너, 진짜 매력 터지지 않니?
I thought about all those paintings: voluptuous maidens reclining in curvaceous splendor,
나는 그 모든 그림들을 떠올렸다. 화려한 곡선미를 뽐내며 비스듬히 누워 있는 풍만한 처녀들,
에리너의 머릿속에 루브르 박물관 미인도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어. 'Voluptuous(풍만한)'나 'Curvaceous splendor(곡선미의 화려함)' 같은 단어를 쓰는 거 봐. 묘사력이 아주 박물관 큐레이터 수준이지? 이런 전형적인 미의 기준과 자신을 비교해보려는 사전 작업이야.
waiflike ballerinas with huge limpid eyes, drowned beauties in clinging white gowns surrounded by floating blossoms.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을 가진 가냘픈 발레리나들, 그리고 떠다니는 꽃들에 둘러싸인 채 몸에 달라붙는 하얀 가운을 입고 익사한 미녀들을.
이번엔 '가냘픈(waiflike)' 스타일과 '비극적(drowned)' 스타일이야. 셰익스피어의 오필리아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해. 에리너는 지금 예술사 속에 박제된 '뮤즈'들의 전형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어. 근데 묘사가 너무 생생해서 좀 무섭기도 하지?
I was neither curvaceous nor waiflike. I was normal-sized and normal-faced (on one side, anyway).
나는 풍만하지도, 가냘프지도 않았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체구였고 평범한 얼굴이었다(어쨌든 한쪽 면은 말이다).
에리너의 무자비한 자아 성찰 시간이야. 명화 속 여인들과 비교해보니 자기는 그냥 'Normal(평범)' 그 자체라는 거지. 마지막에 '한쪽 면은(on one side)' 평범하다고 덧붙이는 부분에서 얼굴 흉터를 암시하며 독자의 마음을 툭 건드려. 에리너는 지금 자기 객관화의 끝판왕을 보여주고 있어.